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두 번째 외국어는 더 쉬울까?
    외국어 학습 2020. 7. 23. 07:07

    "한 가지 외국어를 상당한 수준까지 배운 적이 있다면, 두 번째 외국어는 더 배우기가 쉽다?"

     

    나는 예전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최근에 아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다시 들었다. 잘 알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 사람도 다른 누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나는 영어를 편하게 사용하게 된 이후로 이제 겨우 두 번째 외국어를 공부하려는 입장이지만, 내 경험으로도 그러한 '통설'에 타당성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영어의 어휘나 문법 지식을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영어를 실제로 사용한 경험 때문에 제2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더 쉬워진다.

     

     

    외국어 경험이 곧 외국어 능력

     

    하나의 언어를 습득한다는 것은 그 언어와 관련된 방대한 양의 경험을 축적한다는 것이다.

     

    어휘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많이 암기하면 그것은 지식이 되겠지만, 지식을 모으는 것만으로는 결코 언어 경험이 쌓이지 않는다. 실제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이 그 언어를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지 보고 듣는 것, 그리고 내가 그 언어를 사용하여 의사소통에 실패하거나 성공한 경험, 그런 경험들만이 '언어 경험'이 된다. 즉, 정해진 훈련 지침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제 문제 상황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opportunities to be trained not by training manuals, but by participating a real task)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그런 경험이 쌓이는 것이다.

     

    위의 문단에서 괄호 안의 명사구는 내가 실제로 대학원 진학을 위해 학업 계획서를 쓰면서 지은 영문의 일부이다. 심혈을 기울여서 직접 작성했던 문장이기 때문에 아직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고, 그래서 문맥은 다르지만 비슷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다시 사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경험이다. 예전에 어떤 표현을 사용했을 때의 결과가 성공적이었으면, 나중에 비슷한 상황에서 같은 표현을 다시 사용해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잘 통하면 자주 쓰게 되고, 자주 쓰면 습관이 된다. 그 습관이 곧 나의 언어가 된다. 우리가 모국어를 가지게 된 것도 원래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외국어라고 해서 다른 방식으로 습득해야 할 필요가 없다.

     

    실제의 언어 경험을 통해 어떤 표현이 내 언어 습관의 일부가 되었다면, 나는 그 표현이 참고서에 나오는 다른 어떤 표현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왜 그럴까?

     

     

    내가 알면 중요하고, 모르면 중요하지 않다

     

    내가 고등학생 시절 공부했던 어휘책에는 'impending'이라는 형용사가 수록되어 있다. '임박한, 곧 다가올'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나는 영어로 된 글에서 이 형용사를 읽어본 적이 없고, 듣거나 말한 적이 없다. 그것은 이 단어가 내 수준에 비해 난해한 단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단지 지금까지 이 단어를 읽거나 듣거나 말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적이 없었을 뿐이다. 지금까지 수십년간 단 한 번도 쓴 일이 없는 이런 단어들을, '언젠가 그 단어를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암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휘책과 같은 일종의 훈련 지침서를 바탕으로 지식을 습득한다고 해도, 그것이 앞으로 내가 실제로 경험하거나 사용하게 될 것과 관계가 있으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같은 어휘책의 같은 쪽에는 'suspension'이라는 명사도 있다. 이것은 '중지하다'라는 뜻의 동사 'suspend'로부터 파생된 단어이고, 말 그대로 풀이하면 '중지시키는 것'이 된다. 학업을 중지시켜서 '정학'을 당한 것도 'suspension'으로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단어를 아직 그런 식으로 쓴 적이 없다. 내가 'suspension'이라는 단어를 훈련 상황이 아니라 실제 상황에서 본 것은 전공 과목을 공부할 때였고, 내 전공 분야에서 이것은 '현탁액'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suspension'이라는 단어를 '현탁액'이라는 뜻으로만 사용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편, 나는 'suspend'라는 단어는 잘 알고 있다. 어휘책을 보고 이 단어를 암기했기 때문이 아니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Pirates of the Caribbean: At World's End)의 도입부에 이 단어가 실제로 사용되었고, 내가 그 장면을 인상깊게 보았기 때문이다. 식민지의 임시 총독으로 전권을 휘두르게 된 커틀러 버켓 경(Lord Cutler Beckett)에 의해 계엄령(Martial law)이 선포되는 장면이다. 그를 대리하여 한 해군 장교가 각각의 통상적인 사법 절차와 법적 권리를 일일이 열거하고, 그때마다 'suspended'(중지된다)라는 단어를 덧붙인다. "Rights to assembly, suspended"(집회 결사권 중지)와 같은 식이다. 따라서 해적 행위와 관련이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한 모든 사법 절차와 법적 권리가 중지된다. 그 뒤로 낡고 더러운 옷차람을 한 죄수들이 줄줄이 끌려와서 교수형을 당하는 장면이 지나간다. 그 중에는 노인과 여자와 아이들도 있다. 그와 같이 충격적인 장면 덕분에, 다른 단어는 몰라도 'suspend'라는 단어만큼은 강하게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 장면의 역할은 영화에서 영국 해군과 동인도회사를 독재자처럼 만들어서, 해적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현재의 무법 상태에 제동을 걸고, 공익을 지키기 위해, 대영 제국 국왕의 위임을 받은 커틀러 버켓 경의 칙령으로 비상 계엄령을 선포한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의 도입 부분.

     

    오늘 내가 실제 상황에서 어떤 어휘를 성공적으로 사용했다면(듣거나 읽거나 말하거나 썼다면), 내 삶에서 그 어휘를 사용해야 할 일이 적어도 한 번은 있었다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또한 사람마다 일관된 삶의 방향성과 경향을 가지고 있으니 오늘 내가 처한 상황은 다음에 다시 반복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최근에 영어로 이공계 분야의 학술 논문을 쓴 적이 있다면 십중팔구 그는 그러한 학문을 전공하는 사람일 것이고, 그는 다음에도 그런 일을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내가 최근에 논문을 쓰면서 사용했던 어휘나 표현 등은 다음에도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익혀두면 유용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등산 장비를 미리 챙기지 않고 등산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일단 아무런 장비 없이 등산을 시도한 뒤, 어떤 등산 장비가 있으면 유용할지를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알아내는 것이다. 필요한 준비물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그걸 준비해서 다시 등산을 시도한다. 그런 과정을 반복한다. 그런 식으로 등산 장비를 허술하게 챙기고 무작정 돌진하다가는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지만, 산의 난이도를 적당히 조절하면서 도전하면 대체로 안전하다. 나는 영어를 그런 식으로 공부했다. 그렇게 영어 논문 쓰기의 산을 올랐고, 영어로 교수님과 토론하기의 산도 올랐다. 나한테는 내 또래의 원어민과 일상적인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나이 많은 교수님과 학술적인 주제로 토론하는 것이 더 편하다. 내 관심사나 내가 처한 환경이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나는 외국어를 학습할 때 나의 관심사와 내 삶의 방식, 전공과 진로 등에 비추어 나한테 더 중요한 요소와 그렇지 않은 요소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나한테 중요한 것들은 영어로도 알고,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영어로는 모른다. 이와 같이 내가 영어로 경험한 것들은 제2외국어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내가 어떤 개념을 영어로 알고 있으면 그것은 독일어로도 중요한 것이고, 내가 영어로는 표현하기 힘든 개념이 있으면 독일어로도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결국 외국어란 '선택과 집중'이다. 제1외국어인 영어를 배울 때는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에 집중할지 알아내기 위해 정말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런데 이미 그런 과정을 충분히 겪었다면, 제2외국어를 배울 때는 그런 시행착오를 상당히 줄일 수가 있다. 내가 이미 선택했던 것을 다시 선택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논의는 아마 다른 종류의 제2외국어에 대해서도 보편적으로 적용될 것이다. 다만 독일어는 영어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고, 독일어의 어휘나 문법 요소, 문장 등을 영어에 대응시키는 것이 더 쉽기 때문에, 영어를 먼저 배우고 독일어를 공부하면 특수한 이점을 더 많이 누릴 수도 있다. 앞으로는 이와 같이 독일어의 특징적인 측면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2020.07.23. 아침.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