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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어] "material"은 접미사 "-감"으로 옮기자외국어 학습 2020. 8. 19. 12:31
"material"이라는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는 "재료"이다. 즉, "뭔가를 만들기 위해 사용되는 물질"을 뜻한다. 옷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면 "원단"(fabric material)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맥락에 따라 "원료", "자재" "원자재" 등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대응하는 한국어 단어를 많이 찾을 수 있지만 본질적인 의미는 모두 같다. "원재료"라는 단어를 구성하는 세 한자가 모두 "material"의 의미를 부분적으로 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material science"라는 학문 분야를 지칭하는 한국어 명칭도 "재료과학"이다. 내 전공도 어느 정도 재료과학과 큰 관련이 있기 때문에, "material"을 "재료"라는 의미로 쓰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이 단어는 "자료"(data for an argument), "학습 자료"(learning material)라는 뜻으로도 자주 쓰이는데, 학교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례이기 때문에 내게도 익숙하다. "읽을거리"(reading material)와 같이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기도 하다. 이를 통해 "material"의 의미가 한국어 접미사 "-거리"와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eating material"을 "먹을거리"로 번역하는 것도 아마 가능할 것인데, 실제로 이런 용례로 사용한 적은 없다. 다만 한국어에서 "-거리"를 사용하는 단어가 그렇게 많지는 않고, 항상 "material"에 대응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연 "군것질거리"나 "이야깃거리"를 "material"을 포함한 단어로 번역할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최근에 내가 알게 된 용례는 "wife material", "husband material"과 같이 전통적인 한국어 단어인 "신붓감", "신랑감"으로 번역할 수 있는 경우이다. 이를 통해 "material"의 의미가 한국어 접미사 "-감"과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비슷한 용례의 다른 단어 역시 이런 방식으로 번역할 수 있다. "girlfriend material"(여친감), "boyfriend material"(남친감) 등을 접미사 "-감"을 써서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고, 이와 같은 번역어를 실제로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것이다.
다만 "장난감"(toy)과 같이 단어의 의미가 일정하게 수렴되면서 "material"이라는 의미가 사라진 경우도 있다. 장난감은 과거에 "장난을 위한 재료"라는 의미로 만들어진 단어였겠지만, 지금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성된 물건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런 경우를 제외한다면, 접미사 "-감"은 여러 가지 단어 속에서도 "material"이라는 본질적인 의미를 너무나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clothing material"은 명백히 "옷감"으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Google 번역기를 이용하여 "clothing material"을 번역할 경우 "의류 재료"라고만 번역이 된다. 아직 Google 번역기는 영어의 개별 단어를 한국어 접미사로 번역했을 때 더 자연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 같다. 훌륭한 번역가는 외국어를 해석하는 능력으로 분별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한국어 번역문을 창조하는 능력으로 분별되는 것이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외국어를 공부할 때 번역기보다는 나은 성과를 얻기를 바란다.
심지어 재료과학과 유사한 내 전공 분야에서도 "material"을 "재료"보다는 접미사 "-감"으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례를 찾을 수 있었다. "battery material"은 "배터릿감"으로 번역할 수 있는 것이다. 아직 한국어에 "배터릿감"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 의미는 너무나 분명하게 전달되고 어감도 자연스럽다. 한국어 접미사 "-감"에는 아직도 그 의미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새로운 단어를 창조할 수 있는 커다란 잠재력이 담겨 있는 것이다. "장군감", "놀림감", "땔감" 등 다양한 용례가 아직도 사용되고 있고, 심지어 접미사라는 한계를 넘어 독립적인 명사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사람들이 내가 대통령감이 되겠나 할 때 ‘나도 감이 된다’고 당당히 말하겠습니다."
(2002년 11월, 노무현 전 대통령 연설 중)
사실 위와 같이 접미사 "-감"을 독립적인 명사처럼 사용하는 경우에 실제 발음은 "깜"이 된다. "능력"이라는 의미를 가진 "깜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용한 연설문에서와 같이 "대통령감"이라는 단어는 벌써 꽤 많이 사용되고 있다. 심지어 이 단어를 "president material"라고 번역할 경우 그 의미가 거의 정확하게 전달된다. 문맥에 따라 "연예인감"을 "idol material"이나 "pop star material"로 번역하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늘 그런 식으로 대응을 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star material"은 "항성을 구성하는 물질"이라는 뜻일 수도 있고, "별모양을 그릴 때 필요한 자료"일 수도 있다. "장군감"을 "general material"로 번역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대통령감", "연예인감", "장군감" 등은 모두 "특정한 역할에 어울리는 사람"을 지칭하는 접미사 "-감"의 전통적인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배터릿감"처럼 "재료"라는 의미를 가지는 학술적인 용어들도 "-감"을 이용해서 번역할 수 있는 사레가 더 많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것들을 최대한 찾아볼 생각이다.
이때, "-감"이라는 접미사가 가지는 기본적인 의미는 "…의 재료"가 아니라 "…가 될 수 있는 후보"라고 보아야 한다. "-감"의 의미가 "material"과 유사하지만 정확하게 대응하지 않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예를 들어, '태양을 구성하는 물질'을 "태양감"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하지만 '태양과 비슷한 항성으로 진화할 가능성이 높은 원시적인 천체'를 "태양형 항성감"이라고 부르는 것은 꽤 괜찮게 들린다.
《번역의 탄생: 한국어가 바로 서는 살아 있는 번역 강의》의 저자인 번역가 이희재 선생님은 이러한 노력을 통해 한국어가 더욱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셨다. 지금까지 내가 이 글에서 설명한 것도 이희재 선생님의 번역 철학을 따른 것이다. 이희재 선생님은 번역가의 책무 중의 하나가 한국어의 발전을 위해 이바지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한국어의 역사와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셨다. 그러니 그분의 생각을 단순히 '번역론'이 아니라 '번역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최근에 이 블로그에 작성한 글 [번역론] Hilbert, "So führt BERNOULLI aus" (1900)도 그분으로부터 배운 것들을 충실하게 활용하고자 노력한 결과물이다.
이희재 선생님의 책에는 영어의 개별 어휘를 한국어의 접미사나 접두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풍부한 어감과 생생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게 하는 실제 번역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아마 "material"을 접미사 "-감"으로 번역하는 사례도 그 책에 소개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내가 그 책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당장 확인할 수는 없고,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그분의 책을 읽은 이후로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고, 2017년에는 내가 읽던 책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했다. 책의 모든 내용을 달달 외우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도 언어를 대하는 나의 태도는 모두 이희재 선생님의 번역 철학으로부터 온 것이다. 외국어를 번역할 때뿐만 아니라 그냥 한국어 문장을 구사할 때조차 그렇다.
2020.08.19. 낮.
추신 (1) : 글을 공개한 뒤에 다시 보니, 내가 "material"을 거의 모든 경우에 "meterial"로 잘못 표기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직접 쓴 경우에는 모두 잘못된 철자로 되어 있었고, 관련 용례를 검색해봤을 때에만 올바른 철자로 되어 있었다. "battery material"을 연구하는 것이 내 전공이고 전공 분야에서 영어로 논문을 쓰는데도, 아직 내게는 "material"의 기본적인 철자조차 어려운 것이다! 사실 나는 "material"이 'matter'과 어원이 같고 영어의 'mather'과도 관련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모든 경우 이들 단어는 'mat-'로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에 대한 나의 어떤 경험이나 지식도 영어 단어의 올바른 철자를 알아내는 일에는 도움을 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영어 단어의 철자는 사람의 능력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 나의 기본적인 태도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추신 (2) : 위의 오류를 수정한 뒤 다시 글을 읽어보니, 이번에는 외래어 "배터리"를 모두 "베터리"라고 잘못 표기했음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배터리"가 바로 내 전공 분야이고, 이 단어를 잘못 쓸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밧데리"라는 입말 형태를 보더라도 "a"는 "ㅐ"가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영어의 철자법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마 내가 전반적으로 다양한 영역에서 표기법의 혼동을 겪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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