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SF] 최후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COSMOS 2020. 9. 26. 03:01

    우리 은하에는 다양한 지성적 종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각 종족은 자신이 기원한 고향 천체에서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문명을 건설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권리, 즉 '문명 주권'을 누린다. 따라서 문명이 스스로의 힘으로 생존하고 번영하는 동안 외부에서 먼저 접촉하는 일은 없다.

     

    이러한 원칙은 각 종족의 운명과 미래는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윤리적 이유로 정당화되기도 하지만, 사실은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도입되었고 유지되고 있다. '외부'의 여러 세력들 중 어느 하나가 미숙한 문명을 착취하여 쉽게 큰 이익을 취할 경우 세력 균형이 너무 빠르게 바뀔 수 있음을 염려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은하에서 다자주의를 구현하고 제국주의적 착취를 제한하기 위한 목적으로 약 6천만년 전부터 '우리 은하 문명 연합'이 형성되어 있다.

     

    각 종족은 언젠가 우리 은하 문명 연합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데, 그 방식에 따라 '가입자'와 '편입자'라는 서로 다른 지위를 얻게 된다. 우리 은하 문명 연합의 구성원이 아닌 '방관자'라는 지위를 얻는 종족도 있다.

     

    '가입자'나 '방관자' 지위를 얻게 되는 종족은 고도로 발전한 문명을 이룩하고 외부를 탐사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 은하 문명 연합을 발견하여 접촉을 시도한 종족이다. 문명 연합에서는 이들 종족이 접촉을 시도하기 전부터 그들의 활동을 감지하고 있으며, 조심스러운 것이든 난폭한 것이든 어떤 종류의 접촉에 대해서도 압도적인 우월함을 과시하며 규정된 절차에 따라 '제안'을 전달한다. 따라서 문명 연합의 '제안'이 잘못 전달될 일은 거의 없다. '제안'은 단 하나, 문명 연합에 가입하여 '가입자'가 될지, 가입하지 않고 '방관자'가 될지를 스스로 선택하라는 것이다. 가입자 종족은 문명 연합의 다른 가입자 종족들과 동일한 경제적, 정치적 권리를 누리며 여타의 책임과 의무가 부과된다. 해당 종족이 권위를 인정받는 합리적인 의사 결정 방식에 따라 평화적으로 가입 여부를 결정할지, 가입 결정을 놓고 분열과 내전을 겪을지는 그 종족 나름이다. 문명 연합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그들의 의사 결정에 개입하지 않는다.

     

    '방관자'는 우리 은하 문명 연합의 구성원이 아니며 정치적으로 외부자일 뿐이지만, 여전히 우리 은하에 거주하는 한 문명의 주인으로서 가입자와 동등한 윤리적 지위를 누린다. 따라서 대화와 교류, 교역의 상대로서 늘 존중을 받는다.

     

    '편입자' 종족은 우리 은하 문명 연합의 구성원이지만, 그들의 윤리적 위상과 이에 따른 정치적 지위는 가입자 종족과 동등하지 않다. 이들은 임박한 재해를 막을 능력이 없었거나 자멸의 길을 선택한 종족이기 때문이다. 어느 종족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생존하지 못하는 것으로 판명되면, 해당 종족이 독립적으로 문명을 건설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권리는 취소되고 그 즉시 외부에서 '구조'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해서 우리 은하 문명 연합에 의해 구조된 종족은 더 이상 한 문명의 주인이 아니라 '문명 주권을 상실한 종족'으로 간주된다. 문명 주권을 상실한 종족에게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의사 결정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으며, 그럼에도 우리 은하 문명 연합에 의해 구조되어 편입되기를 거부한다면 멸종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을 터였다. 편입자라는 명칭은 그 의미를 굉장히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과거에 편입자 종족의 정식 명칭은 '문명이기를 포기한 자'였고, 그들의 하등함과 미개함을 강조하는 다양한 멸칭으로 불리곤 했다.

     

    따라서 편입자 종족이 된다는 것은 해당 종족이 존속하던 동안 그들에게 일어난 가장 비참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그들은 구조되어 생존하기는 했지만 윤리적으로 그들은 이미 멸종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멸종 직전의 종으로 전락하고, 그들의 문명이 얼마나 미약하고 어리석은 것인지를 통렬하게 깨닫고 서로를 비난하던 최후의 순간에야 외부의 개입 덕분에 간신히 목숨만을 부지할 수 있었던 '한심한' 종족이다. 사실 편입자 종족은 그들이 그나마 우리 은하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수도 있다. 다른 은하였으면 스스로 자멸의 길을 선택할 정도로 한심한 종족은 손쉽게 노예 종족으로 전락했을 것이며, 고향 행성에서 거주할 권리조차 빼았겼을 가능성이 크다.

     

    인류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Kopernikanische Wendung)이라고 부르던 역사적 사건은 여러 번 발생했지만, 인류가 바로 이와 같은 편입자 종족에 속하게 된 것이야말로 '최후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이제는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이 속한 종족에 대해 자긍심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 어떤 새로운 발견이나 위대한 사업도 인류의 몫으로는 남지 않았다. 인류가 여전히 지구에서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첨단 기술과 지식은 모두 더 뛰어난 다른 종족의 자비로움에서 비롯되었다. '무임승차자'는 한때 인간들이 서로를 비난하기 위해 쓰던 표현이었으나, 이제 문명 연합 내에서 인류를 나타내는 별칭이 되었다. 인류는, 자신들이 한때 주인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고향 행성에서, '무임승차자'로 살아가게 된 것이었다.

     

     

     

     

    2020.09.26. 새벽.

    2023.01.16. 새벽에 수정.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