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만어파 언어 비교

내가 독일어를 배우기로 한 언어학적인 이유

독륜 2020. 7. 21. 02:54

독일어와 영어

 

독일어는 영어와 마찬가지로 게르만어파 서게르만어군(West Germanic languages)에 속하는 언어이다. 다시 말해, 영어와 독일어는 뿌리가 같다. 따라서 비슷한 점도 많다. 예를 들어 독일어의 'mehr'[meːɐ̯]는 영어의 'more'[ˈmɔɹ]와 동계(cognate)이고 의미나 용례도 거의 같다.

 

영어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이라면, 독일어를 배우면서 독일어가 영어와 어떤 점이 비슷한지 찾아보는 것도 재미가 있을 것이다. 어떤 것들은 일부러 알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된다. 조금 더 조사를 해야 발견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뿌리가 같은 두 언어에서 서로 비슷한 점을 찾는 일은 두 언어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두 언어의 뿌리가 같다는 것을 이미 언어학자들이 입증한 상황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차이점들이 왜 생겼는지를 이해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각각의 언어는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되기까지 오랫동안 변천을 겪었고, 이를 연구하는 것은 언어학자들의 몫이다. 전공자가 아닌 사람들은 기껏해야 몇 가지 경향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독일어의 전치사 'zu'[t͡suː, 추:]는 영어의 'to'[tʊ, ]와 동계이고, '10'을 뜻하는 'zehn'[tseːn] 'ten'[tɛn, ]과 동계이다. 이런 사례들을 바탕으로 독일어에서 'z'[ts] 발음을 가지게 된 단어들이 영어에서는 't' 발음을 가지게 되는 경향이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서게르만어군에 속한 다른 언어들에서 이들 단어들이 어떤 형태를 가지는지를 분석하면 아마 더 많은 것들을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영어와 뿌리가 같은 게르만어파의 언어를 하나 공부하면 영어의 기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러한 이유로 나는 독일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래 그림은 링크를 참조하라.)

 

Germanic languages with respective dialects for each language. (This file is licensed under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Share Alike 4.0 International license.)

서게르만어군의 다른 언어들

 

물론 게르만어파 서게르만어군에 속하는 언어가 영어와 독일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스코트어(Scots)는 중세 영어의 북부 방언에서 파생된 언어로서 영어의 방언으로 볼 수 있다. 영어 및 스코트어와 가장 가까운 공통 조상을 가지는 다른 언어로는 프리슬란트 언어들(Frisian languages)이 있다. 서부 프리슬란트어는 40만명 정도의 화자를 가지고 있는데, 프리슬란트 언어들 중 그나마 가장 화자가 많다. 이들 화자들의 대부분이 네덜란드의 '프리슬란트 주'에 거주한다.

 

나는 YouTube의 Langfocus 채널에서 서부 프리슬란트어를 소개하는 영상을 보고 처음으로 프리슬란트 언어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 영상에 달린 댓글 중 영어와 프리슬란트 언어들의 관계를 잘 요약하는 것들이 몇 개 있다. 그 중 하나를 옮기자면 이렇다.

 

 

"프리슬란트어는 영어가 프랑스 대신 네덜란드랑 다녔을 때 모습 같다." (by Pizzachu22)

Frisian is like if English decided to hang out with the Dutch instead of the French.

 

 

영어, 프리슬란트어, 네덜란드어, 독일어를 각각 비교해보자.

 

 

"She has read fifteen books this year." (영어)

"Sy hat dit jier fyftjin boeken lêzen." (서부 프리슬란트어)

"Ze heeft dit jaar vijftien boeken gelezen." (네덜란드어)

"Sie hat dieses Jahr fünfzehn Bücher gelesen." (독일어)

 

 

위의 4개 예문에서 서부 프리슬란트어와 네덜란드어, 독일어는 모두 어순이 같다. 서로 대응하는 단어들이 정확하게 같은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영어만 어순이 다르다.

 

영어 예문에서는 'this year'가 문장의 가장 뒤에 온다. 가장 앞에 오게 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this year'를 주어와 동사 사이에 넣거나, 동사와 목적어 사이에 넣거나, 'has''read' 사이에 넣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즉, 영어에서는 (주어)-(동사)-(목적어) 또는 (주어)-(have 동사)-(과거분사)-(목적어) 형태의 구문이 철저하게 이 순서대로 지켜지고 중간에 다른 요소가 없어야만 자연스러운 문장이 된다.

 

반면 서부 프리슬란트어와 네덜란드어, 독일어에서는 'this year'에 해당하는 단어('dit jier', 'dit jaar', 'dieses Jahr')가 모두 'have 동사'에 해당하는 조동사('hat', 'heeft', 'hat') 바로 뒤에 오고, 목적어가 그 다음에 온다. 'read'에 해당하는 과거분사('lezen', 'gelezen', 'gelesen')이 문장의 마지막에 온다. 만약 영어를 이런 어순으로 쓴다면 매우 어색할 것이다.

 

 

"She has this year fifteen books read." (독일어식 어순의 영어)

 

 

영어 및 스코트어와 가장 가까운 언어가 프리슬란트 언어들이라고 하지만, 위의 예문들을 비교했을 때 서부 프리슬란트어는 영어보다 네덜란드어나 독일어를 더 닮았다.

 

예를 들어 서부 프리슬란트어에서 '읽다'에 해당하는 동사 'lêze'는 네덜란드어 동사 'lezen', 독일어 동사 'lesen'과 동계이다. 사실 대부분의 게르만어파 언어에서 이와 동계인 단어를 '읽다'라는 뜻의 동사로 사용하는데, 영어는 우연히 그것과 기원이 다른 'read'라는 단어를 '읽다'라는 뜻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책'을 뜻하는 'boek'[buk]는 영어의 'book'[bʊk]과 닮았다. 하지만 네덜란드어의 'boek'[buk]'을 더욱 닮았다. 복수형인 'boeken'은 네덜란드어를 더 닮았다. 그래서 Langfocus 영상에 달린 댓글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영어랑 가장 친한 언어가 사실은 네덜란드어와 더 친해. 영어 불쌍해. ㅠㅠ" (by Ariyan Eighty)

The closest language to English is actually closer to Dutch. Poor English :(

 

 

사실 언어들 사이의 관계를 촌수(genetic distance)로 따지자면 위의 댓글은 사실이 아니다. 서게르만어군 언어들의 계통도를 보면, 영어와 프리슬란트 언어들은 서로 형제지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을 묶어 앵글로프리지아 언어들(Anglo-Frisian languages)이라고 하기도 한다. 서로에 대한 각각의 촌수가 다를 이유는 없다.

 

이들 '형제'에 대해 네덜란드어와 독일어는 각각 사촌지간이고, 서로에 대해서는 두 언어가 형제지간이다. 특정한 어휘들이 공통적으로 겪은 음운 변동을 보면 이를 이해할 수 있다. 네덜란드어와 독일어에서 '치즈'는 각각 'kaas'[kɑːs, 카즈], 'Käse'[kɛːzə, 케저]와 같이 'k'로 시작하는 발음이다. 반면 서부 프리슬란트어의 'tsiis'[tsiːs, 치스]는 영어의 'cheese'[t͡ʃiːz, 치즈]와 비슷한 방식의 음운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언어들 사이의 관계를 닮음으로 따지자면 위의 댓글은 사실일 수도 있다. 영어는 라틴어와 프랑스어, 켈트어파 언어들의 영향을 받아 게르만어파 언어들의 특징을 많이 잃어버린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바이킹들이 사용하던 북게르만어군 언어의 영향을 받아 서게르만어군 언어의 특징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앞서 4개 예문에서 확인한 것과 같이 영어만 다른 언어들과 어순이 다르고, 다른 계열의 동사를 사용하는 것 등이 그 예이다.

 

결국 게르만어파 언어들의 특징을 영어보다 많이 간직하고 있는 프리슬란트어, 네덜란드어, 독일어의 문법은 크게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이들 언어들 중 어느 것을 선택해서 배워도 영어의 기원을 탐구하고자 하는 나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에도 큰 차이는 없을 터였다.

 

 

언어를 선택할 때의 기준: 접근성과 매력

 

그렇다면 내가 게르만어파의 언어를 새로이 공부하기 전에 고려한 다른 변수는 무엇이었을까?

 

접근성이다. 내가 실제로 그 언어를 접할 가능성이 높아야 하고, 그 언어에 대해서 매력을 느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독일어를 선택했다.

 

대략 8~9년 전부터 나는 독일어로 된 음악을 들었다. 처음 들었던 것은 Lacrimosa의 Malina라는 곡인데, EBS 지식채널e 영상에 배경음악으로 삽입되었던 것을 듣고 그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몇 년간 Lacrimosa의 음악만을 집중적으로 찾아서 들었다. 또 나중에는 Rammstein 등 독일 락밴드의 음악을 듣게 되었다. 아마도 RammsteinDu Hast라는 곡이 영화 《매트릭스》의 OST로 쓰인 것을 들은 것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또한 일본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의 OST로 쓰인Vogel im kafigBauklötze 등은 제목과 가사가 독일어로 되어 있고, 무엇보다도 명곡이다. 수년 동안 나는 독일어로 된 음악들을 가사의 의미도 알지 못하면서 음악이 좋아서 들었다.

 

가사의 의미를 알고 싶으면 사실 가사를 찾아서 기계 번역으로 뜻을 알아내면 된다. YouTube에는 가사를 영어로 번역하여 함께 보여주는 영상도 많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내가 직접 독일어를 공부해서 가사의 뜻을 알아내고 싶다는 생각이 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가한 일을 도대체 '언제' 하게 될까?

 

본업인 이공계 분야에서의 학술 활동을 수행하다보니, 독일어로 된 오래된 논문을 참고문헌으로 인용하게 된 일이 있었다. '그때' 비로소 확신을 가졌다. 이제 내가 독일어를 공부하게 될 것임을.

 

아주 오랫동안 이공계 학문이 독일어로 이루어져 왔다는 것은 상식이다. 마음만 먹으면 아인슈타인이 쓴 독일어 논문도 찾아서 읽어볼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내가 일부러 그런 일들을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가 어떤 독일어 논문을 직접 읽고 인용해야 할 실제적인 필요가 생긴 것이다.

 

논문의 제목은 Li3Al2, eine neue Phase im System Li/Al이었다. 특정한 합금의 결정 구조에 관한 논문이다. 이전에도 독일어 논문을 인용한 적은 있었지만, 너무 오래된 논문이라 원문을 구하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이번에는 원문을 구했고, 내가 직접 읽었다. 문장을 해석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영어와 매우 닮은 특징적인 구절들, 예컨대 'dreidimensionale Netzwerk'(3차원 네트워크)와 같은 것들의 의미는 알 수 있었다. 따라서 내가 그 논문에서 찾기를 기대하던 내용도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이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내가 어떤 일을 할 때는 그것을 '왜' 하는지가 중요하다. 나는 취미로도 자전거를 타고 운동을 삼아서도 자전거를 타지만, 그것들이 본질적인 이유는 아니다. 내가 자전거를 탈 때는 반드시 A라는 장소에서 B라는 장소로 이동해야만 하는 이유나 상황이 먼저 주어져야만 한다. 그게 바로 자전거의 본질적인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개인적으로 정한 것이다. 자전거를 본질적인 목적에 맞게 쓰는 것만 확실하다면 이유 자체는 꼭 필연적이지 않아도 상관없다. 예를 들어 A에서 B까지 버스를 타고 가도 되는 상황에서 나는 굳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 편이다. 책을 택배로 집에서 받아도 되지만 굳이 자전거를 타고 서점에 가는 편이다. 다시 말해 사소한 것이더라도 굳이 어딘가로 이동해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서 자전거를 탄다. 어쨌든 이유가 없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A에서 B까지 이동해야 하는 이유는 얼마든지 많이 찾아낼 수 있지만, 때로는 단 하나의 이유만 있어도 충분하다.)

 

새로이 언어를 배울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 언어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것도 아니고, 그 언어를 직접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 주어진 것도 아닌데, 단순히 '있어 보이기 위해서', '취미로' 언어를 공부하는 사람은 나와는 성향이 많이 다른 사람일 것이다. 새로이 언어를 배우는 사람은 그것을 본래의 목적에 맞게 쓰고자 해야 한다.

 

물론 언어란 결국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어떤 언어를 알고 있으면, 그 언어로 된 영화를 볼 때나, 하다못해 그 언어로 된 YouTube 댓글을 볼 때 의사소통이라는 본래의 목적이 저절로 달성되는 것이다. 특정 언어에 대한 접근성이 크고, 또 그 언어에 대해 더 매력을 느낄수록, 언어를 본래의 목적에 맞게 쓰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 언어를 배울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접근성매력,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프리슬란트 언어들은 매력적일 수는 있지만 화자 수가 적고 접근성이 너무 떨어진다. 네덜란드어도 상당한 접근성과 매력을 가지고 있겠지만, 내게는 독일어가 더 매력적이고 더 접근성이 크다.

 

내가 처음으로 가사를 해석한 독일어 노래는 Lacrimosa의 Seilador였다. 단 두 줄의 간단한 가사가 반복되기 때문에, 두 줄만 해석하면 끝이었다. 그때가 2020년 6월 28일 새벽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은 그 이후로 3주 정도가 지난 7월 21일이다. 처음에는 노래 가사를 해석하는 과정을 일기장에 쓰는 것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공부한 것들의 양이 꽤 쌓였다. 이제는 그것들을 블로그에 조금씩 옮겨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본래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각자가 정의하기 나름이다. 꼭 독일에 가서 독일인과 대화를 하는 것만이 독일어의 본래 목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독일어로 된 노래 가사를 해석하는 것도 독일어를 본래의 목적에 맞게 쓰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단순히 한가하고 허새 가득한 취미 생활을 위해서 '언어 학습'을 선택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앞으로 그런 식으로 독일어를 공부하기로 했다.

 

 

2020년 7월 21일. 새벽.